가을밤, 저마다의 노래가 하나의 위로가 되었다제19회 돌체 열린음악회…우리 가곡과 오페라, 뮤지컬과 시낭송이 전한 ‘음악, 그 이상의 감동’[이트레블뉴스=이정인 시인·칼럼니스트] 가을이 시작된 9월 8일 저녁, 송파문화예술회관 송파홀에서 열린 ‘제19회 돌체 열린음악회’를 찾았다. 공연장을 향할 때만 해도 한 편의 음악회를 관람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공연을 모두 보고 객석을 나설 때는 마음속에 오래 묻어두었던 그리움 하나를 조용히 꺼내어 바라본 듯했다.
누구에게나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다시 만날 수 없어 더 그리운 사람도 있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멀어진 사람도 있다. 때로는 이름조차 부르지 못한 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사람도 있다.
이날의 음악은 바로 그런 마음을 찾아왔다. 애써 잊고 살아온 기억을 흔들어 깨우고, 바쁜 일상에 가려져 있던 내면의 깊은 곳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등을 토닥이듯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송파구민과 함께하는 음악, 그 이상의 감동’을 주제로 열린 이번 음악회에는 우리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 뮤지컬 음악, 시낭송이 한 무대에 올랐다.
출연진이 선택한 곡과 목소리의 색깔은 저마다 달랐지만 공연은 마치 처음부터 하나의 이야기로 쓰인 작품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시낭송은 노래의 문을 열었고, 한 곡의 가곡은 다음 곡의 정서를 불러냈다. 오페라의 깊고 웅장한 울림 뒤에는 우리 가곡의 따뜻한 서정이 이어졌으며, 뮤지컬 음악의 뜨거운 힘은 공연 전체에 새로운 생명력을 더했다.
그렇게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시작된 노래들은 그리움과 위로, 사랑과 희망이라는 하나의 마음으로 모였다.
시낭송이 열어준 마음의 문 공연의 문은 시낭송가 이강철과 심미옥이 함께한 ‘우리는 자랑스런 한국인이어라’가 열었다. 말에도 고유한 음악이 있다. 시인의 언어가 낭송가의 목소리와 호흡을 만나자 한 구절 한 구절이 살아 움직이며 객석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시낭송은 이날 펼쳐질 음악의 정서를 여는 문이자, 관객의 마음을 무대 앞으로 불러 모으는 초대였다.
시가 낭송으로 되살아나고 다시 노래와 선율로 이어지는 구성은 이번 음악회의 성격을 잘 보여주었다. 문학과 음악은 서로 떨어져 있는 예술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어라는 사실을 느끼게 했다.
저마다의 목소리로 완성한 하나의 무대 이날의 감동은 어느 한 사람의 노래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시낭송가 이강철과 심미옥을 시작으로 김미현, 문상준, 백현애, 강한별, 김승진, 김숙영, 조신미, 김보영, 정세욱, 김은정, 강신주, 이혜전, 조주태, 손영미, 이진우, 조일순, 오경숙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저마다의 목소리와 음악적 색채로 공연을 빛냈다.
김미현의 ‘물방울’은 맑고 투명한 정서를 전했고, 문상준의 ‘산노을’은 노을이 내려앉은 산과 하늘의 풍경 속으로 관객을 이끌었다. 백현애의 ‘자클린의 눈물’에서는 슬픔과 그리움이 깊은 서정으로 피어났고, 강한별의 ‘아름다운 나라’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힘찬 목소리로 전했다.
김승진이 부른 베르디 오페라 ‘맥베스’의 아리아는 비극적 인물의 고통과 절규를 강렬하게 전했고, 김보영의 ‘Pace, pace, mio Dio’는 평화를 갈망하는 인간의 절박한 내면을 깊이 있게 표현했다.
김숙영의 ‘살짜기 옵서예’는 친근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매력으로 객석의 분위기를 밝게 했으며, 조신미의 ‘봉정사’는 고요한 산사의 풍경과 그 안에 깃든 마음을 노래로 펼쳐 보였다.
조주태의 ‘시인의 노래’는 시와 음악이 하나가 되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고, 손영미의 ‘가을의 기도’는 계절의 문턱에 선 관객들의 마음을 차분히 어루만졌다.
이진우의 ‘고향생각’은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자리한 고향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냈고, 조일순의 ‘마음꽃 향기는’은 사람의 내면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마음의 향기를 전했다. 오경숙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삶의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위로로 다가왔다.
한 곡 한 곡의 제목과 이야기는 달랐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살아오며 한 번쯤 느꼈을 사랑과 이별, 그리움과 희망이 담겨 있었다.
세월의 깊이로 피어난 ‘봉선화’ 모든 출연진의 무대가 저마다 아름다운 감동을 전한 가운데, 테너 정세욱이 부른 우리 가곡 ‘봉선화’는 특별히 깊은 여운을 남겼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노래이지만 이날의 ‘봉선화’는 이전에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음정이나 성량, 기교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긴 세월을 살아온 한 사람의 삶이 목소리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 견뎌낸 시간과 지나온 계절들이 한 소절 한 소절에 배어 있는 듯했다. 젊은 날의 목소리가 찬란한 빛이라면, 세월을 품은 목소리는 삶의 깊은 그늘까지 끌어안은 빛이었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살아온 날들의 무게로 객석의 마음을 조용히 움직였다.
그 노래를 듣는 동안 우리는 한 곡의 가곡을 넘어 한 사람의 긴 생애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숙연했고,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나이 듦은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만이 아니라, 젊은 날에는 가질 수 없었던 삶의 깊이와 향기를 얻어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이날의 ‘봉선화’는 한 곡의 가곡이면서 한 사람의 생애였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마주하게 될 시간에 대한 노래였다.
‘태극기’, 시인의 언어가 힘찬 노래로 피어나다. 시인이자 현 송파구청장인 서강석이 시를 쓰고 정영택 작곡가가 곡을 붙인 ‘태극기’도 인상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태극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상징이다. 그러나 한 편의 시와 음악으로 다시 만난 태극기는 단순한 국기를 넘어 우리가 지나온 역사와 희생, 자유와 평화를 품은 존재로 다가왔다. 소프라노 김은정은 ‘태극기’를 힘차고 당당한 목소리로 불렀다. 맑고 단단한 음성은 무대를 가득 채우며 작품이 지닌 기상과 자긍심을 객석에 온전히 전달했다.
서강석 시인의 시어와 정영택 작곡가의 선율, 김은정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하나로 만나자 태극기가 무대 위에서 힘차게 펄럭이는 듯했다. 그 안에는 우리가 지나온 역사가 있었고, 오늘을 살아가는 국민의 마음이 있었으며,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할 자유와 평화의 가치가 담겨 있었다.
김은정은 ‘그대가 꽃이라면’을 통해 ‘태극기’와는 또 다른 섬세하고 서정적인 감성을 보여주었다. 한 성악가의 목소리가 작품에 따라 얼마나 다채로운 색깔로 변화할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한 무대였다.
뮤지컬 ‘영웅’이 일깨운 뜨거운 마음. 테너 강신주가 부른 뮤지컬 ‘영웅’의 노래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한아름이 작사하고 오상준이 작곡한 뮤지컬 ‘영웅’의 음악에는 안중근 의사의 삶과 신념, 조국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이날 강신주의 노래는 힘 있고 웅장한 성량을 들려주는 데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던 한 인간의 고뇌와 결단이 그의 목소리 안에 함께 담겨 있었다.
노래가 절정으로 향할수록 객석에는 뜨거운 긴장과 숙연함이 번졌다. 우리가 누리는 오늘이 누군가의 희생과 결단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한 무대였다. 그것은 한 영웅을 찬양하는 데 그치는 노래가 아니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신념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노래였다.
이어 강신주가 부른 ‘하나 되어 나아가는 문화의 힘’은 문화와 예술이 사람을 연결하고 공동체를 하나로 만드는 힘을 전했다. 서강석의 시와 음악감독 장동인의 곡이 만나 공연의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세월의 깊이를 품은 ‘봉선화’가 인생의 무게를 들려주었다면, ‘태극기’는 나라를 향한 자긍심을 일깨웠고, 뮤지컬 ‘영웅’은 삶을 관통하는 신념과 용기를 되새기게 했다.
서로 다른 노래였지만 결국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혜전의 두 노래, 송파의 풍경에서 금강산의 그리움까지... 소프라노 이혜전은 이날 ‘꿈꾸는 석촌호수’와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다. 서영순이 시를 쓰고 임긍수가 곡을 붙인 ‘꿈꾸는 석촌호수’에서는 송파의 아름다운 풍경과 지역의 정서가 한 편의 음악시로 펼쳐졌다. 석촌호수의 물결과 계절,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와 선율을 통해 살아나는 듯했다. 관객들에게 익숙한 지역의 공간이 음악을 만나 새로운 감동의 풍경으로 태어났다.
이어진 ‘그리운 금강산’에서는 분위기가 한층 깊어졌다. 이혜전의 목소리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을 향한 민족의 오랜 그리움을 객석에 전했다. 송파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꿈꾸는 석촌호수’와 분단의 아픔과 염원을 담은 ‘그리운 금강산’. 서로 다른 두 곡이었지만 한 사람의 목소리 안에서 고향과 땅,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사랑스러운 웃음을 선물한 ‘고양이 이중창’ 깊고 진지한 감동이 이어진 가운데 소프라노 백현애와 김숙영이 함께 부른 로시니의 ‘고양이 이중창’은 객석에 사랑스러운 웃음을 선물했다. 두 사람은 마치 고양이들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재치 있는 표정과 몸짓, 조화로운 호흡으로 무대를 채웠다.
말 대신 고양이 울음소리로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두 성악가의 유쾌한 모습에 객석에서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깊은 감동과 긴장 속에 있던 관객들의 마음도 잠시 가벼워졌다. 엄숙함과 장중함만이 클래식 음악의 전부는 아니다. 백현애와 김숙영의 사랑스러운 이중창은 클래식 음악 안에도 재미와 해학, 익살과 친근함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김보영과 정세욱이 함께한 ‘La vie en rose’ 역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어우러지며 공연에 낭만적인 색채를 더했다. 독창이 한 사람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면 이중창은 두 사람의 목소리가 만나 만들어내는 조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서로의 소리를 듣고 기다리며 함께 하나의 음악을 완성하는 모습은 우리 삶에 필요한 화합의 의미도 생각하게 했다.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서영순 대표의 진행. 서영순 대표는 시인이자 작시가이며 음악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출연자와 작품을 따뜻하게 소개하고, 각기 다른 분위기의 곡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무대와 객석 사이를 아름답게 연결했다.
모든 출연진이 각자의 자리에서 빛날 수 있도록 이끌며 차분하고 세심한 진행에서는 음악과 사람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 특히 자신이 작시한 ‘꿈꾸는 석촌호수’가 무대에서 노래로 울려 퍼지면서 시와 음악, 송파의 풍경이 하나로 만났다. 오랜 시간 음악을 통해 시민과 시민을 연결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도 공연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무대 위에서 공연을 완성한 음악의 힘 피아노 연주와 음악감독을 맡은 장동인은 서로 다른 장르와 출연진의 무대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했다. 성악가들의 목소리를 섬세하게 받쳐준 피아노 선율과 작품마다 달라지는 음악적 분위기는 각각의 노래가 가진 매력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첼리스트 김상호의 연주는 무대에 깊고 따뜻한 색채를 더했다. 첼로 특유의 중후한 선율은 인간의 목소리처럼 객석의 마음에 다가왔고, 노래와 노래 사이의 감정을 풍성하게 이어주었다. 성악가와 시낭송가, 음악감독과 연주자, 작곡가와 작시가, 진행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다했기에 서로 다른 작품들은 한 편의 긴 음악시로 완성될 수 있었다.
삶이 힘겨운 날, 다시 떠올릴 한 소절 공연의 마지막에는 출연진과 관객이 함께 ‘목련화’를 불렀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넘어 모든 사람이 하나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순간, 공연장은 거대한 하나의 울림이 되었다. 서로 이름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이 같은 선율을 따라가며 같은 마음을 나누었다. 그 순간 음악은 누군가가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되었다. 공연장을 나서는 마음이 공연을 보기 전보다 한결 따뜻하고 평온해져 있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마음 깊은 곳에 슬픔을 묻어두어야 할 때가 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하루를 살아가지만, 내면에서는 오래된 상처와 그리움이 가만히 숨 쉬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런 날에는 한 곡의 노래가 필요하다. 내 마음을 대신 울어주고, 지나온 시간을 다독여주며, 그래도 삶은 계속 살아볼 만하다고 말해주는 노래 말이다.
제19회 돌체 열린음악회는 바로 그런 음악을 들려준 무대였다.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리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했고, 마음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게 했으며, 그곳에 따뜻한 위로의 빛을 밝혀주었다.
누군가의 노래는 세월의 깊이를 전했고, 누군가의 노래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웠다. 또 다른 노래는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했으며,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건넸다.
어느 한 곡도 홀로 존재하지 않았다. 출연진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와 연주로 공연의 한 부분을 채웠고, 그렇게 모인 노래들이 하나의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공연은 끝났지만 감동은 멈추지 않았다. 가을밤의 어둠을 지나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음악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음악으로 서로의 삶을 위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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